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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싸미 신미대사 영화 예고편

2019.06.23 15:47

朴民宇 조회 수:2588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는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모친의 뱃속에서 나올 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왕(王)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 때부터 이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하여 국법에 의하여 잡아 죽였던 것이기에 죽음을 면하려고 배안 병신노릇을 아니할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릅뜨면 안광이 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 만한 기품이 있었고 관상학 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 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 하여 머리 깍고 스님이 되었다. 



   * 출가 이유

 신미스님은 1403년 김훈의 맏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이름은 수성(守省).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이행의 딸이었다. 사대부 집안 가문서 태어난 수성은 성균관에서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하지만 옥구진병마사로 있던 아버지 김훈이 조모상을 치르지 않고 임지를 떠났다는 이유로 집현전 학자였던 박팽년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이 일을 지켜본 김수성은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에게 출가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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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 나들이 2019년 5월 17일


한글 창제의 유서 깊은 곳에서 하루 . . .


환단원류사학회 회원 김주식, 강상원박사, 법성 스님, 김태수 

 



  처음에 법주사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


 세종은 재위 26년에 五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七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세종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 동안에 세분을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할 적에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또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이 공으로 문종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 하였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 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가까워 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들어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영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100종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 도갑사(道岬寺)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상 3구(軀)를 조성·봉안했다.

 1458년에 국가의 요청으로 해인사(海印寺)의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諺解)된 불경이 〈법화경〉·〈반야심경〉·〈영가집〉 등이다. 

 1464년 왕이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이해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가,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신미는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해석하여 유통하게 했는데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 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 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 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를 비롯하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 낙산사(洛山寺) 대자암 등을 중신하고, 국책으로 처불함에도 소신껏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성종10년에 열반에 올라 복천사 남쪽 200미터에 신미부도(信眉浮屠)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12호이다.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한 신미대사



 그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은 한글 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 사적기(福泉庵事蹟記) "세종은 복천암(福泉庵)에 주석하던 신미대사(信眉大師)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梵語)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면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 1416호)이 있다.

 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1403~1480)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그 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

 그 동안의 정설은 세종대왕이 명령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의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범자(梵字)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범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한글 창제의 주역인 신미대사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산김씨 족보 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세종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대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대사 밖에 없었다고 한다.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숭유억불정책(崇儒抑佛政策)으로 집현전 학자들 중에 반대하는 학자(최만리,김문,정창손 등)들이 많았으며, 한글창제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까지 올리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신미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고 신미대사(信眉大師)에 대한 세종(世宗)의 신뢰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보은 속리산에는 법주사란 이름 높은 절이 있고 이 절에 고명한 스님들이 주석하였기에 이 절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혜각존자 신미대사가 한때 이 절에 주석하여 면벽관심(面壁觀心)으로 불도에 정진하고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어느 겨울날 밤에 이 절의 중진급스님 3.4명이 헐레벅떡 정신없이 신미대사의 수도장에 문을 두드리고 뵙기를 청하였다.

 내용인즉 이러하다 도둑 20여명이 벌떼같이 절에 침입하여 젊은 중들을 묶어놓고 장차 창고를 털 기세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높은 스님 신미대사 의 지시를 받으러 온 것이다.

 이 놀랍고도 끔찍한 말을 전한 스님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말도 제대로 못했다.

 이런 뜻밖의 일을 당한 신미대사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태연히 말을 했다.

 이 칠칠찮은 것들 떨기는 왜 떨어! 도둑이 떨 일이지 주인이 왜 떠느냐? 이렇게 꾸짖고는 명령을 내렸다.

 모든 창고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마음대로 다 가져가라고 했다.

 이 법주사는 토지가 많아서 일년에 천여석의 수확을 할 뿐 아니라 비단과 무명 기명과 잡화가 창고에 많았다.

 이 말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 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쌀이며 비단이며 무명이며 기명 등 닥치는 대로 멜빵이 끊어지도록 힘껏 짊어지고 도망을 쳤다.


 긴긴 겨울밤이 보얗게 새도록 구슬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도망을 쳤는데 이것이 웬일인가!

 밤새도록 죽을힘을 다하여 도망을 쳤건만 법주사 경내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밤새도록 법주사만 뺑뺑 돈 셈이다.

 신미대사의 도력에 잡힌 것이다.

 이에 놀라고 당황한 도둑떼는 겁에 질려 솜같이 나른한 몸을 이끌고 신미대사 앞에 나가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며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신미대사는 태연히 도둑떼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너희들의 눈을 보니 모두 착한 사람이다. 이 순간이라도 사악한 마음을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왜들 이러느냐 마음을 바로 잡아라”


라고 이렇게 순순히 타오르는 대사의 자비로운 얼굴에는 춘풍이 만면하였다. 

 도둑들은 대사의 말에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다고 한다.






<뿌리공원에 새겨진 영산김씨(永山金氏) 유래>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이다. 

 나, 여(羅, 麗)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중 고려말의 전객시령공이 영이(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 낙향 할 제 두 아들과 세 사위도 사직하고 영동(永同)으로 은거했다. 

 장자 판도판서 길원(吉元), 차자 판삼사 포(苞)와 장서 이부시랑인 순천박공 원용(元龍), 차서 한성판윤 구례장공 비(丕), 삼서 대제학 밀양박공 시용(時庸) 등 이상의 어른들은 여조에 벼슬했고 장서했다. 

 신왕조 조선이 개국되자 비로소 출사 했으니 종경(宗敬)은 우천성을 이르렀고 이어서 아들 훈(訓)은 영의정이요 그 아들 수온(守溫)은 당대의 대학자요 이조 팔대 문장가로 많은 시문과 저서가 있었고 벼슬은 판서 대제학 영중추 부원군에 이르렀다. 

 특히 저서 월인천강지곡은 불후의 명작이다. 

 이하 후손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명인 달사가 많았지만 다 기록하기 어렵고 임정요인으로 조국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만리이역에서 서거한 김철(金澈)의 유해가 아직 환국을 못한 것이 유감이다. 

 조선조의 대학자요, 팔대문장가(八大文章家)인 김수온 (金守溫)은 창공에 높이 솟은 문필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작품에 문필봉을 상징화 했음. 

 아무리 뛰어난 예지와 상념일지라도 실천이 있어야 진가가 발휘된다. 손은 실천을 상징함과 동시에 전진을 상징했음. 

 월인천강지곡은 불후의 대작이요, 명작임을 손을 들어 대중에게 과시하고 있음. 

 후면의 학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조화하여 영원히 발전해 가는 영산김씨의 미래상을 상징화 했다. 


 영산김씨(永山金氏)는 김영이(金令胎)를 1세조로 받든다. 기록을 보면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김익광(金益光)의 후손으로 고려 때 전객서령(典客署令:고려때 빈객의 연향(宴享:국빈을 대접하는 잔치)을 보던 관청으로 태조4년(921)에 두었고 충렬왕24년(1298)에 전객시로 바꿈.

 령(令)은 종3품 벼슬)을 지내고 죽은 후에 [추충동덕보사공신]으로 검교 도첨의찬성사(檢校 都僉議 贊成事:도첨의의 정2품 벼슬.검교는 벼슬앞에 붙이는 명예직)에 추증되고 영산군(永山君)에 추봉되었다.


시조 김영이(金令貽)의 아들 김길원(金吉元)은 고려 공민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고려시대에 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판도사의 으뜸 벼슬)에 올라 유명하였는데 판도판서로 있을 때 홍건적을 토벌하고 공민왕을 안동으로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한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封)해지자 후손들이 김영이(金令貽)를 1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영산(永山.영동 永同)을 본관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산부원군 김길원(1328~1396) 묘역 <충북 영동군 영동읍 산이리 분통골> .김길원은 홍건적을 토벌하고 공민왕을 복주(안동)로 피난시킨 공으로 영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김길원(金吉元)의 아들 김종경(金宗敬)은 정종 때 춘추관(春秋館:시정의 기록을 맡아본 관아)과 성균관(成均館: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관아)의 벼슬을 역임한 후 도총관(都摠管:오위도총부의 정2품 벼슬)에 올랐다.

 또한 김종경(金宗敬)의 장남 김 훈(金訓)은 소윤(小尹:정4품 벼슬), 둘째 아들 김 량(金諒)은 참판(參判:6조의 종2품 차관)의 벼슬을 지내면서 영산김씨가문은 대를 이어 명성을 떨쳤다.


 조선초기에 영산김씨는 김종경의 손자 김수온(金守溫:1409~1482)이 세종과 세조때의 명신으로 많은 일화를 남겨 가문을 중흥시켰다.


 서기 1441년(세종23)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한 김수온은 중시(重試:이미 급제한 문신에게 거듭보는 시험으로 이시험에 합격하면 당상관에 보임됨)를 거쳐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 正字:교서관은 경서.문서등의 교정을 맡아보던 관청. 정자는 정9품 벼슬)로 있으면서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역대의 사적 중에 귀감이 될만한 사실만을 뽑아서 엮은 책)과 의방유취(醫方類聚: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동양최대의 의학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부사직(副司直:오위의 종5품 무관직)으로 있을때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발영시(拔英試)-1466년(세조12) 문.무백관에게 임시로 실시한 과거로 5월10일 단오때 문신 100여명에게 지필을 주어 즉석에서 각자 시.부.송을 지어 올리게했는데 신숙주.최항이 시관이 된 이 시험에서 함격자 34명중 김수온이 장원을하였고 세조는 김수온에게 쌀 20섬을 하사하고 3일간 연회를 베풀었다 함.


*등준시(登俊試)-세조12년(1466년) 8월 왕이 현직 관리와 종실.부마 등을 대상으로 시험을 보게 한것으로 왕이 과거제목을 정하고 <신숙주.노사신.한계희> 등을 대독관으로 삼아 강년전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이때도 김수온등 12명이 1등을 함.


그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한 중추부의 으뜸 종1품 벼슬)에 올라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며 항상 청빈하게 살았다고 전한다.


 서기 1471년(성종2)에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다.학문과 문장(文章)에 뛰어나 명나라에 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고 한다.


당대의 석학(碩學)인 구종직(丘從直)은 김수온이 남의 표문(表文:외교문서)을 지어준것을보고 모래위에 꿇어 앉으면서 "평소에 공(公)의 문장이 교묘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김수온의 형인 김수성(金守省)은 신미(信眉)라는 법명으로 탈속하여 웅문거필(雄文巨筆)로 유명하였다고 하며 속리산 성불사 복천암(福泉庵)에 그의 사리(舍利)가 있다.


 김수성은 석보상절(釋譜祥節)의 편찬에 동생인 김수온과 함께 형제가 참여한것으로 유명하다.

석보상절은 석가보.법화경 등에서 석가의 일대기를 뽑아 한글로 엮은 책으로,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의 가족과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고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은 김수성(신미)과 김수온 형제의 도움을 받아 편찬·간행하였다.


 다음해인 세종 29년(1447) 세종은 이 <석보상절>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라 김수온의 도움으로 찬가 <월인천강지곡.보물 398호>을 지었는데 이것이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의 특색은 

 첫째, 한글은 큰 활자를 쓰고 이에 해당되는 한자는 작은 활자를 썼다.

 둘째, 한글의 자체는<용비어천가>와 같으나 원점을 쓰지 않았다.

 셋째, <훈민언해>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받침 없는 한자음에 ‘ㅇ’의 종성을 붙이지 않았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유물이며 조선 전기의 언어와 어법을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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